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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빈 홍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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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국영 . . . . 34회 일치
          | 가문 = [[풍산 홍씨]](豊山 洪氏)
          | 친인척 = [[홍낙순]](백부)<br/> [[경주 김씨]] 부인(백모)<br/>[[원빈 홍씨]](누이동생)<br/> [[상계군|상계군 이담]](양외조카)
         '''홍국영'''(洪國榮, [[1748년]] ~ [[1781년]] [[4월 28일]]([[음력 4월 5일]])<ref>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4월 5일 세 번째 기사</ref>)은 [[조선]] 영조,정조대의 [[세도]] 정치가.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豊山)이며, [[자 (이름)|자]]는 덕로(德老)이다. 세손궁의 궁료(宮僚) 시절 때부터 [[조선 정조|정조]](正祖)의 총애를 얻고, 정조 즉위 후 부홍파(扶洪派)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세간에는 흔히 권력을 잡은 후 세도를 부리다가 축출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축출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서울 풍산 홍씨들의 비조격인 홍이상의 8대손, 선조의 적녀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서, 역시 영안위 후손인 [[혜경궁 홍씨]]와 11촌의 동문이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그의 아버지 [[홍낙춘]]에 대해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이는 대개 홍낙춘이 주류에 속하지 못한 인물이었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실제로 조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낸 인물이고 백부인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고 숙부인 홍낙빈도 진사였으나, 홍낙춘은 원빈이 후궁이 되기 전에는 관직을 얻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776년]] 3월 정조는 즉위 3일 만에 그를 전격적으로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했다. 이어 7월에는 승정원 최고직인 [[도승지]]로 승진시킨다. 이후 그는 정계에서 물러날 때까지 거의 줄곧 도승지직을 맡았으며(원빈 사후 약 2개월 동안 물러났던 적이 있었음) 이 당시 도승지의 별칭인 "지신사"는 곧 홍국영을 가리키는 대명사처럼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 문관으로는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예문관 직제학, 홍문관 제학, 규장각 직제학, 이조참판, [[대사헌]] 등의 역임했다.
         군문의 장임으로는 정조 즉위년 11월 수어사에 임명되었던 것을 시작으로 잠시 총융사를 거쳐 [[1777년]] 5월에는 금위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대개 금위대장과 훈련대장을 돌아가며 맡았다.(그러나 훈척만이 맡을 수 있는 호위대장에 임명된 적은 없다.) [[1777년]](정조1년) 7월, 전술한 [[홍상간]], [[홍계능]]의 궁궐자객침투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 사건 연루자에 호위청의 무사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유로 호위청을 축소하였는데 <ref> 이 때문에 호위청은 3청에서 1청으로, 인원은 1000명에서 350명 가량으로 축소되었다. </ref>, 대신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홍국영을 그 대장에 임명 하였다. 정조는 숙위대장에게 특별히 대장패와 전령패를 차게 하며, 안으로 위장, 부장, 금군과 도감의 군병, 각문의 수문장ㆍ국별장과 밖으로 궁궐 담장 바깥에 삼군영의 입직하는 순라까지 매일 숙위대장에게 보고하도록 조치했다. 이런 보직들은 대개 겸직이었으며 그의 대표적인 보직은 도승지와 훈련대장/숙위대장, 약원부제조였다.<ref>홍국영은 (원빈 사후 2개월 가량을 제외한) 집권 기간 대부분 동안 약원부제조직을 맡았다. 이는 임금의 최측근인 그가 임금의 생명과 건강을 책임지고 보살핀다는 의미도 있지만 동시에 하루동안 임금과의 공식적인 면대를 2회 이상 가질 수 있게 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으로도 해석된다.</ref> 그외 각종 제거 역시 다수 겸직하였으며 잡류 제거직으로 인한 격무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기록도 종종 보인다.
         1778년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가 정조의 후궁이 된다. 이때 원빈 홍씨의 지위는 유례 없는 것이었다. 후일 이 모든 이례적인 처사는 모두 홍국영의 세도로 인해 일어난 일이란 식으로 설명되게 된다. 혜경궁은 《한중록》에서 "홍국영이 자교(이 경우 후궁 간택령)를 내리게 했다"라고 쓰고 있다. 《한중록》에서는 이어 원빈의 입궁에 대해, 홍국영이 세도를 탐내어 제 누이를 들여보낸 것으로 자신은 이에 반대하는 입장이란 식으로 기록했다. 그런데 《(정조)어제인숙원빈행장》(정조가 원빈 사후 작성한 원빈의 생전 행적을 기록한 글)에서는 혜경궁 자신의 진술과는 반대로 혜경궁이 원빈에 대해 각별한 정의(情誼)를 나타냈다고 한다.<ref>[http://yoksa.aks.ac.kr/jsp/aa/HajeView.jsp?aa10up=kh2_je_a_vsu_20664_000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ref> 《순조실록 혜경궁 행장(김조순 저)》에서 혜경궁은 원빈에 대한 각별한 정의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 강조한 대목이 있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wa_11601021_002 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 1월 21일 신축 2번째기사]</ref> 홍국영 일가의 인물이 지은 것으로 보인다는 고전소설 《숙창궁입궐일기》는 원빈의 입궐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혜경궁은 효의왕후 쪽인 인상을 준다.<ref>{{웹 인용|url=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31844|제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숙창궁입궐일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홍국영의 누이 [[원빈 홍씨]](元嬪 洪氏)는 가례를 올린 지 1년이 되지 않아 급작스럽게 사망했다. 《한중록》에는 홍국영이 원빈의 죽음을 독살로 여기고 그 배후로 [[효의왕후]]를 의심하여 왕비의 나인들을 혹독하게 고문했다는 내용을 전하며 그 죄를 성토하는 대목이 있다<ref>순조실록에서 같은 건으로 탄핵당하는 대상자는 [[정민시]]이다.</ref>.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홍국영의 몰락에 대해서는 각종 설만 난무할 뿐, 제대로 알려진 것이 없다. 탄핵의 포문을 연 김종수의 상소에서 언급된 공식적인 탄핵 사유는 '후궁 간택을 막았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원빈의 수원관)완풍군을 정조의 양자로 들여 동궁으로 삼으려 했다는 가동궁 사건설도 몇몇 군데에서 언급된다. 정조7년 문양해 반란사건 당시 '왕비의 목숨을 위협했다'라는 기록도 있고,《정종대왕묘지문》에는 홍국영이 [[은전군 이찬]]([[조선 정조|정조]]의 이복 아우)을 죽게해서 몰락했다고 정조가 원망했다는 기록도 있다. 속설 중에 홍국영이 완풍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았다거나, 효의왕후 김씨의 음식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 발각되었다는 등의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나, 이는 19~20세기에나 등장한 야사로 짐작된다.
         *** 누이 : [[원빈 홍씨]] (元嬪 洪氏)
         * [[혜경궁 홍씨]]
         * [[원빈 홍씨]]
         [[분류:1748년 태어남]][[분류:1781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한국의 섭정]][[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유교 신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풍산 홍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 정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노론]]
  • 헌경왕후 . . . . 15회 일치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생전에 받은 존호로는 [[1778년]](정조 2년)에 효강(孝康), [[1783년]](정조 7년) 자희(慈禧), [[1784년]](정조 8년)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에는 그의 회갑을 기념하여 휘목(徽穆)이란 존호를 받고 효강자희정선휘목혜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에는 정조의 생모였으므로 법적으로는 혜빈이었지만 혜빈이라는 칭호 대신 혜경궁으로 불렸다. 흔히 경의왕후(敬懿王后)라 하지만 죽은 후 받은 시호가 헌경이었고 의(懿) 자는 황후로 추존된 후 받은 제호(帝號)로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한중록]]의 저자이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이고 [[서울]] 출신.
         [[1762년]](영조 38년) [[7월 12일]](윤[[5월 21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자는 뒤주에서 나오지 못하고 폭염 속에서 사경을 헤매었고 결국 뒤주에 갇힌 지 8일 만에 아사(餓死)하였다. 영조가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면서, 홍씨에게는 '혜빈(惠嬪)'의 호를 내렸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ua_13805121_002&grp=&aid=&sid=0&pos=0|제목=영조실록 99권 38년(1762년 임오 / 청 건륭(乾隆) 27년) 윤5월 21일(을묘) 2번째 기사|확인날짜= |저자= 영조실록|날짜 =|출판사=조선왕조실록|원본일자=1762-5-21|인용=}}</ref>
         [[1776년]](정조 즉위년) 영조가 83세에 서거하고, 대리청정하던 세손 이산이 25세의 젊은 나이에 등극하니, 곧 조선의 제22대 왕 정조이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어머니 혜빈 홍씨 역시 '혜경궁(惠慶宮)'으로 궁호가 높아졌다. 당시 왕실에서 혜경궁 홍씨가 제일 연장자였으나, 서열상 10살 아래인 [[정순왕후 (조선 영조)|정순왕후]]가 대비의 위치를 차지하여 왕실 서열상 제2위의 위치에 있었다.
         [[1795년]](정조 19년) 그녀가 회갑을 맞는 해에, 혜경궁 홍씨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저술하였다. 한중록은 한번에 쓰인 게 아니라 십수년에 걸쳐 여러 번 쓰였으며 목적도, 내려준 사람도 각기 다른데 후대에 누군가가 모아서 책으로 엮은 것이다. 집안의 명예회복이란 아들 정조가 죽은 후 벽파계의 공격에 의해 친동생이 사사당하고 아버지가 역적으로 다시 몰리자 그에 대해 변호한 것으로 가문의 원수였던 김귀주 계열, 벽파 계열에 대한 원한이 드러나 있으며 친동생의 죄목이나 아버지에 대한 공격등에 대해 정조 생전의 말이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상세하게 거론하며 조목조목 변론하고 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정조의 아들이자 혜경궁 홍씨의 손자인 [[순조]]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정조 치세기간 부터 집필하던 회고록 한중록(閑中錄)의 제목을 순조 즉위 후 한중록(恨中錄)으로 고쳤다. 이를 두고 [[1910년]]부터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그가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신을 변호하고, 자신의 친정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냐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본가 [[풍산 홍씨]](豊山 洪氏)'''
         * 11촌 조카 : [[홍국영]], [[원빈 홍씨]]
         ****** 며느리 :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 혜경궁 홍씨의 처소 궁녀 출신
         [[조선 정조|정조]]의 생모 [[혜경궁 홍씨]], [[조선 정조|정조]]의 다른 최측근인 홍국영은 [[정약용]]과 인척관계이기도 하다.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가 [[홍국영]]의 증조부뻘, 혜경궁에게는 할아버지뻘이 된다.
         홍이상의 둘째 아들 홍영(1584년생)과 넷째 홍탁(1597년생)은 13년 나이차였고, 홍영의 증손자 홍중기(홍만용의 아들)와 홍탁의 손자 홍만기가 동갑이었고, 홍탁의 손자 홍만기는 40세가 다된 늦은 나이에 아들 홍중후를 봤다. 홍중후는 1687년생으로 8촌인 홍중해(홍국영의 고조부), 홍중기(혜경궁 홍씨의 증조부)와는 29세와 38세의 나이차이가 난다. 따라서 같은 항렬임에도 나이차가 많이 나게 되었다.
         [[분류:1735년 태어남]][[분류:1816년 죽음]][[분류:조선의 추존왕후]][[분류:조선의 왕세자빈]][[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 정조]][[분류:운현궁]][[분류:풍산 홍씨]][[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한국의 자서전 작가]][[분류:18세기 한국 사람]][[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 장조]]
  • 홍인한 . . . . 11회 일치
         |친척= 형 홍봉한, 사촌형 홍상한, 조카 혜경궁홍씨, 조카사위 사도세자, 외종손 정조, 외종손 의소세손, 8촌형 홍창한, 9촌조카 홍낙춘, 10촌 종손 홍국영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 아버지(숙부)이며, 관찰사를 지낸 홍창한은 8촌 형이 된다.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 있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통덕랑]]이 되었다. 통덕랑으로 재직 중 [[175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는 조선의 대표적 명문 가문인 [[풍산 홍씨]] 가문의 일원이며, 혜경궁 홍씨의 친정 숙부라는 점도 작용해 [[영조]]의 신임을 받으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53년 가주서와 [[정언]]을 지내고 1754년 [[교리]]로 있을 때 [[조영순]](趙榮順)을 변호하려다 파직되었다.
         [[1774년]] [[우의정]]에, [[1775년]]에 [[좌의정]]에 각각 임명되었으며, 1775년 세손(훗날의 정조)이 대리청정을 맡게 되자 이를 반대해 [[영조]]가 세손의 대리청정을 명할 때 세손은 세가지를 알 필요가 없다 강변하며, 승지와 사관의 대필을 방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의 대리청정 뜻이 확고해지자 [[혜경궁 홍씨]]는 사전에 삼촌에게 편지를 보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한중록]]에 의하면 대조의 뜻이 그러함을 편지로 알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홍인한은 벽파의 당론에 따라 벽파, 외척당, [[정후겸]] 등과 함께 세손을 반대하였고, 홍인한은 영조의 면전에서 세손의 대리청정을 반대했다. 이후 [[정후겸]], [[심상운]] 등과 함께 [[홍국영]] 등을 모해하는 상소를 올렸다. 또한 부사직 심상운을 시켜 세손의 대리청정 반대 여론을 조장했지만, [[홍국영]]의 부탁을 받은 부사직 서명선이 역탄핵상소를 올려 논박했고 오히려 심상운은 유배되었다.
         한편으로 권력남용을 하고는 자기쪽 무리들과 야합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홍씨(洪氏)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東宮)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면서 그것을 구실로 온 세상의 입을 막으며 위협을 가했다고도 한다.
         아버지 [[홍봉한]]이 탄핵당할 때는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혜경궁 홍씨]]도 그의 사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한다.
         *** 여동생 : 풍산홍씨
         * [[혜경궁 홍씨]]
         [[분류:1722년 태어남]][[분류:177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가족 살해자]][[분류:사형된 사람]][[분류:독살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분류:노론]]
  • 한확 . . . . 6회 일치
         |배우자= 홍씨 부인
         은현면에 있는 그의 부인 남양홍씨의 신도비는 [[임사홍]]이 지었다.
         * 부인 : 남양부부인 홍씨 - [[남양 홍씨]] [[이조판서]], [[대제학]] 문양공 홍여방(洪汝方)의 딸 - 3남 6녀
         부인 홍씨의 묘소는 [[양주군]] 은현면 용암리에 있다.
         부인 홍씨의 신도비는 왕족, 후궁 여성 외의 여성의 신도비로서는 최초로 건립된 것이다. [[1497년]](연산군 3년) [[3월 16일]] [[소혜왕후]]의 명으로 [[임사홍]]에게 신도비문을 짓게 하여 수립하였다.
  • 흥친왕 . . . . 6회 일치
         |배우자 = 풍산 홍씨, 여주 이씨, 첩 1명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풍산 홍씨 홍병주(洪秉周)의 딸과 결혼하여 [[이준용]], [[이문용]] 형제와 2녀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뒤에 38년 연하인 참봉 이인구(李麟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밖에 1명의 첩에게서 서녀 1명을 보았다. 남달리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뜻을 거슬리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런 그보다 영특하고 야심만만한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더욱 총애한다. 그는 여러번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낙방하였다.
         [[1887년]] [[12월]] 첫 부인 풍산홍씨와 사별하였다. 상처한 그는 57세에 20세인 여주이씨 이인구의 딸과 결혼하였다. 여주이씨는 그의 아들 [[이준용]]보다 13살 연하였고, 며느리인 [[광산 김씨]]보다도 5년 연하였다. 결국 [[운현궁]]의 살림은 며느리 광산 김씨의 몫이 되었다.<ref>며느리 광산 김씨 역시 아들 이준용의 재취였다.</ref>
         처음 그의 시신은 [[경기도]] [[김포군]] [[고란대면]](古蘭臺面) 풍곡리 야산 좌곤(坐坤)에 안장되었다가, [[1921년]] [[9월 1일]] [[양주군]] [[화도면]] 창현리(후일의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로 이장되었다. 이때 처음 [[광주군]] [[세촌면]] 수곡리 계좌에 안장되었다가 다시 [[양주군]] [[회암면]] [[회암리]](후일의 회천읍 회암리)에 안장되었던 부인 풍산홍씨 역시 이장되어 합장되었다. 그의 묘소 북서편, [[이우 (1912년)|이우]]의 묘소 우측 언덕에 후일 [[흥선대원군]] 내외의 묘소가 이장, 조성되었다.
         * 첫째 부인 : 풍산 홍씨(豊山 洪氏, [[1844년]] [[4월 8일]] ~ [[1887년]] [[12월 19일]]), [[통덕랑]](通德郞) 풍산인(豊山人) [[홍병주]](洪秉周)의 딸.
         ** 며느리 : 군부인 증 흥친왕비 남양홍씨, 판서(判書) 남양인(南陽人) [[홍종석]](洪鍾奭)의 딸.
  • 강화종실 . . . . 3회 일치
         [[정조]] 시기에 권세가 [[홍국영]]은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는데, 그녀를 원빈이라 하였다. 1980년 원빈이 사망하자, 홍국영은 은언군의 장남 담(湛)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서 장차 정조의 왕위를 이어받게 하려 했으나, 1786년(정조 10년) 담은 모반죄로 유폐당하였다. 이를 계기로 은언군은 강화도에 유배된다.
  • 박수홍(코미디언) . . . . 3회 일치
         한편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이 진행하는 방송에서 게스트로 나온 박수홍이 과거에 만나서 만든 친분을 잊어버리는 자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신동엽에게 당한 걸 방송에서 언급했는데, 과거 여러 연예인들이 모였던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금방 많이 가는 바람에 어쩌다가 평소 친분이 약해서 어색한 사이였던[* 둘이 나이도 같고 연예계 생활 시작시점도 비슷하지만 데뷔초부터 활동한 방송국도 다르고, 개그맨인데 젊은 여성층에 인기가 많은 느낌이라 이미지도 비슷해서 함께 출연한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다.] 박수홍과 신동엽 단둘만이 우연히 따로 술을 마시게 되었고, 주당으로 유명한 신동엽이 박수홍을 살짝 테스트하려고 "수홍씨 이거 마실 수 있겠어요?"라고 물으며 독한 술을 많이 따라 줬는데, 술이 약한 박수홍은 순간 멈칫했지만 신동엽과 친해지기 위한 목적으로 거절하지 않고 속이 뜨거워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다 받아마셨다고 한다. 그러자 이를 본 신동엽이 밝게 미소를 지으며 마음에 들어했고 그러면서 몇잔 더 하다가 급격히 서로 친해졌다고 한다. 그래서 박수홍은 기회다 싶어 근처에 있던 신동엽의 집까지 바래다 주게 되었고, 그 집앞에서 집으로 들어가려던 신동엽이 먼저 "수홍아 오늘부터 우리 친구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포옹까지 했다고 한다. 박수홍은 신동엽과 친구가 된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래 동엽아! 우리 이제부터 친구야! 친구! 친구야 잘 들어가!"라고 하면서 헤어졌다고 한다. 박수홍은 자기 집에 돌아가면서도 너무 뿌듯해서 뛰어가기도 했고 그날 이후로도 계속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약 일주일뒤 방송국에서 신동엽을 본 박수홍이 신나서 악수하려고 다가갔는데 "동엽아"라고 말하려는 순간 신동엽이 "아 수홍 씨 오셨어요."라고 고개숙여 인사를 하는 바람에 박수홍도 "아 네 동엽 씨"라고 하면서 똑같이 인사하고 헤어졌다고 한다. 이날 이 이야기를 듣고 민망해진 신동엽이 수습을 위해 "뭐 술 많이 마시면 잊어버릴 수도 있는 거죠~ 아무튼 그럼 다시 친구하면 되죠? 그래 수홍아! 친구하자!"라고 방송 중에 바로 다시 친구를 먹기로 제안했고, 애초에 이 상황을 원해서 원망의 이야기를 했던 박수홍은 "그래! 동엽아! 친구야! 우리 다시 진짜 친구하는거야!"라고 받아들이면서 악수와 포옹을 했으나, 그래도 약간 의심이 남아서 자리에 앉은 뒤에도 살짝 의혹의 눈빛으로 웃으면서 "이래 놓고 또 잊어버리는 거 아니지? 어?"라고 했다. 그 이후 박수홍이 방송에 출연만하면 "[[강호동]],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과 절친하다."라고 언급을 하고있고 [[1박 2일]]에서 강호동[* 강호동의 경우는 야심만만을 함께 진행한 지 1년 정도 뒤에 회식 술자리에서 이미 친구를 먹기로 했다고 한다.]과 박수홍이 서로 반말을 하면서 통화하는 장면이 나온 것으로 보아 절친한 친구 사이인 것 같다.
          * 위의 일화와 관련하여 실제로 다른 사람들에게 목격된 일화가 있다. 박수홍은 동기였던 최승경과 사이가 나빴는데, 어느 날은 방송국 스튜디오 뒷문 쪽 계단있는 곳에서 최승경이 먼저 공격하고 박수홍이 반격하여 싸운 것. 박수홍의 주장에 의하면 당시 자신이 준비하던 코너에 한 명을 더 넣어야 할 상황이 생겨서 최승경을 넣으려다가 그가 이미 다른 코너를 하고 있어서 김수용을 넣게 되었는데, 피디가 최승경에게 "수홍이가 승경이 니가 그 코너를 안 하겠다고 말했다던데"라는 말을 해서 오해가 생기고 싸움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박수홍은 자신은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아마 프로그램 피디가 잘못 알고 오해가 생긴것으로 추정. 이에 최승경 본인이 원래 박수홍과 함께 개그맨 된 직후부터 계속 박수홍에게 말을 안 놓는 등 신경전[* 최승경 말로는 그 말 안 놓는게 동기 중에 둘 사이에서만 길어지자 신경전이 생긴거라고 한다. 어느 날은 방송 끝나고 서로 수고했다고 인사할때 본인이 평소대로 "수홍씨 수고하셨어요"라고 하자 박수홍이 어이없다는듯 "수홍씨?"라고 하며 본인을 응시한 적이 있어 불쾌한 적이 있었다고.]을 했고 싸우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남희석에게 "나 KBS 본관에서 박수홍 깔 거야"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당시 [[남희석]]은 덩치가 컸고, 어릴 때 유도도 했던 최승경이 상대이기에 박수홍이 선빵을 맞으면 일방적으로 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박수홍이 맞은 뒤에도 반격을 하면서 싸움을 멈추지 않는 걸 보고''' 놀랐다고 한다.[* "난 그냥 수홍이형이 승경이한테 한대 맞고 나면 '에구'하고 쓰러져서 그냥 바로 질 줄 알았어. 근데 수홍이형도 몸이 날래더라고. 맞자마자 투다닥 파박 하면서 바로 반격하고 싸우는데 진짜 놀랐어."라고 증언했다.] 동료 개그맨들이 말린 뒤에 보니 결국 --선빵의 영향으로-- 박수홍의 얼굴이 찢어져 출혈이 심해 병원까지 가서 4바늘을 꿰맸다고 한다. 당시 그런 박수홍을 급하게 방송국에서 병원까지 이송한 사람이 [[유재석]].[* 그런데 유재석은 둘이 싸운 거라던가 다친 것에 대한 관심보다는 동기의 새 차를 자신이 처음으로 운전하게 된 것을 즐거워 했다고 한다.--어??--] 그리고 이 사건으로 최승경은 KBS에서 거의 제명당하다시피 했다.
  • 한창수 . . . . 3회 일치
         * 증조모 : 풍산 홍씨
         ** 친조모 : 풍산 홍씨
         **** 본처 : 남양 홍씨, 홍종서의 딸
  • 홍순언 (1530년) . . . . 3회 일치
         그의 가계는 남양 홍씨 첨사(詹事) 홍호(洪灝)의 동생인 예사 홍복(洪澓, 일명 홍복(洪復))의 12대손이다. [[가선대부]]에 추증된 [[홍겸]](洪謙)의 서자였다. 출신지는 한성부라는 설과 [[경기도]] [[광주군]]이라는 설이 있다. 1899년에 편찬된 [[경기도]] [[광주군]]의 향토지인 광주군지 인물편에 그에 대한 소개가 간략하게 실려 있다. 할아버지 홍경창(洪慶昌)은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안동부사(安東府使)등을 역임했고, 큰아버지 홍신(洪愼)은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양주목사(楊州牧使), 형조참의(刑曹參議), 공조참의(工曹參議) 등을 역임하고 [[1539년]](중종 34년)에는 [[명나라]]에 진하사(進賀使)로 다녀오기도 했다. 아버지 홍겸은 [[1531년]] 역과에 급제하여 [[명나라]]에 두 번 역관으로 다녀오기도 했다.
         * 남양홍씨세보
         [[분류:조선의 공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병사한 사람]]
  • 홍영식 . . . . 3회 일치
         '''홍영식'''(洪英植, [[1856년]] [[2월 5일]]([[1855년]] [[음력 12월 29일]]) ~ [[1884년]] [[12월 7일]]([[1884년]] [[음력 10월 20일]]))은 [[조선]] 말기의 문신, 외교관, 시인이다.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이며 [[갑신정변]]의 주역<ref>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95776 '프라하의 연인'과 김옥균, 북촌을 걷다] - 오마이뉴스. </ref>으로, 자는 중육(仲育), 호는 금석(琴石),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서울 출신이다. 한국 [[우편]], [[우표]] 제도의 선각자이기도 하다.<ref name="뉴스메이커">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5&artid=17600&pt=nv <nowiki>[우정이야기]</nowiki>우초(우표)를 아십니까] - 뉴스메이커 776호([[2008년]] [[5월 27일]]자) </ref><ref name="노컷"> [http://www.cbs.co.kr/Nocut/Show.asp?IDX=214016 근대 우편은 언제 시작됐나 : '우편, 우표, 우체국 이야기'] - 노컷뉴스, [[2006년]] [[4월 21일]]자(김선경 기자). </ref> 개화파의 중진으로서 신설된 우정총국의 총판(總辦)이 되어 낙성식을 기회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할 때 홍영식도 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찰 대상은 병제였으나, 홍영식은 [[우편]]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 홍영식이 역체국에 찾아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여 모든 서류를 증여하고 직원으로 하여금 우편실무를 설명시키고 자신도 홍씨를 만나 우편 제도를 설명하고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ref name="노컷" />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884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우편]][[분류:우표]][[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혁명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홍명희]][[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살해된 사람]][[분류:부관참시된 사람]][[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사상가]]
  • 홍지호 . . . . 3회 일치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고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며 [[경기도]] [[여주시|여주]]와 [[김포시|경기도 김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현재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서울 홍지호 치과의원(舊 서울 홍지호·이신정 치과의원) 원장을 지내고 있다.
         * 형: 홍성호<ref>홍성호(洪聖鎬) 의학박사의 [[본관|본관(관향)]]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학사 학위를 거쳐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원]]을 의학석사·의학박사 학위하였고 한때 [[영화 배우|영화여배우]] [[이미숙]]과 결혼하였다가 이혼하였으며 이후 전진숙이라는 일반 여성과 재혼한 그는 한때 [[연세대학교|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겸임교수]] 겸 [[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전임강사]]를 역임 이후 현재 경기도 용인 홍성호 성형외과 원장을 지내고 있다.</ref> (洪聖鎬, 1947년 ~ ) - [[성형외과]] [[의사]] 및 의학박사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유 연애]][[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 문근영 . . . . 2회 일치
         || [[2015년]] || [[사도(영화)|사도]][* 아들 정조 역의 [[소지섭]]보다 되려 10살이나 연하이다.] || [[혜경궁 홍씨]] || 624만 명 || 성공 ||
          * [[코믹 메이플스토리]]에는 문그여로 찬조출연했다.[* [[송혜교]], [[원빈]]도 송혀교, 원비로 찬조출연했다.][* 도도, 아루루, 델리키는 예쁜모습으로 나올거라 기대했지만 정작보니....]
  • 최재성(배우) . . . . 2회 일치
         젊은 시절 모습을 보면 [[원빈]]과 [[지창욱]]을 많이 닮았다는 이야기가 많다. ~~사실은 원빈과 지창욱이 이 쪽을 더 닮은 거지만...~~
  • 한호문 . . . . 2회 일치
         * 부인 : 남양홍씨(南陽洪氏, ? ~ ?년 5월 2일), 부사 홍여성(洪汝誠) 의 딸
         묘소 인근에는 [[한확]]의 부인 남양부부인 홍씨 묘소가 조성된 이래<ref>http://www.joongboo.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8986 </ref>, 그의 일가의 묘역과 양주시정수장, [[서정대학]] 등이 소재해 있다.
  • 홍석형 . . . . 2회 일치
         '''홍석형'''(洪錫亨, [[1936년]] [[10월 1일]] ~ )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이다. 당중앙위원회 비서 겸 계획재정부장으로 있었으며,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었다.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분류:홍명희]]
  • 홍성유 . . . . 2회 일치
         '''홍성유'''(洪性裕, [[1928년]] [[10월 4일]] ~ [[2002년]] [[11월 24일]])는 [[대한민국]]의 [[소설|소설가]]이다.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호(號)는 백파(伯坡)이다.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정일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수환 . . . . 2회 일치
         '''4전5기 챔피언의 신화'''라는 [[닉네임]]으로 유명한 그는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한때 [[1955년]]에서 이듬해 [[1956년]]까지 [[경기도]] [[시흥군]] [[과천시|과천면]](지금의 경기도 [[과천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의 본관은 [[남양 홍씨|남양]](南陽)이며 종교는 [[개신교]]이다. 프로 통산 전적은 41승(14KO)5패4무.
         [[분류:195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자유 연애]][[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WBA 챔피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중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영락고등학교 동문]][[분류:인천전문대학 동문]][[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홍승목 . . . . 2회 일치
         '''홍승목'''(洪承穆, [[1847년]] [[음력 10월 11일]] ~ [[1925년]] 양력 [[2월 15일]])은 [[조선]] 말기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찬의를 지냈다. 자는 경희(敬熙), 호는 연운(硯耘),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본적은 [[경기도]] [[경성부]] 계동이다.
         [[분류:1847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풍산 홍씨]]
  • 홍진 . . . . 2회 일치
         '''홍진'''(洪震/洪鎭, [[1877년]] [[10월 3일]]([[음력 8월 27일]]) ~ [[1946년]] [[9월 9일]])은 [[대한제국]]의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며 [[1926년]] [[7월]]부터 [[1926년]] [[12월]]까지 제5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냈다. 본명은 '''홍면희'''(洪冕憙), 본관은 [[풍산 홍씨|풍산]]. 아명은 봉근(鳳根) 또는 우봉(又鳳). [[호]](號)는 '''만오'''(晩悟). [[충청북도]] [[영동군]] 출생.<ref>[[한성부]] 출신설도 있다.</ref> [[1946년]] [[7월]] 심장천식으로 입원, 입원 중 남상철의 권고로 영세를 받고 세례명은 [[안드레아]]이다.
         [[분류:1877년 태어남]][[분류:1946년 죽음]][[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법관양성소 출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김구]][[분류:이승만]][[분류:의친왕]][[분류:김좌진]][[분류:이범석 (1900년)]][[분류:한국독립당 (1930년)|+]][[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분류:풍산 홍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화완옹주 . . . . 2회 일치
         *** 올케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홍씨]] (獻敬懿皇后 洪氏, 혜경궁 홍씨, 1735년~1815년)
  • 김민희(1982) . . . . 1회 일치
         특히 [[김효진(배우)|김효진]], [[원빈]]과 함께 출연했던 [[한솔엠닷컴]]의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라는 주제의 광고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아래 동영상) 이어 [[차태현]], [[신민아]]와 출연한 CF에서는 '''"내가 니꺼야? 난 누구한테도 갈 수 있어!",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등의 명대사를 만들었는데 사실상 [[20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공전절후의 유행어가 되었다. 이 유행어는 당시에 수많은 패러디를 낳았으며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편이다.[[https://youtu.be/0GsJpuPUEVo|1편]][[https://youtu.be/Ax8EIOyGF34|2편]][[https://youtu.be/ZVxij2AQel0|3편]][[https://youtu.be/Hh74Xv_kq80|4편]]
  • 봉준호 . . . . 1회 일치
         * [[하이트진로]] MAX (2010년) ※[[원빈]]과 공동출연
  • 오늘만 산다 . . . . 1회 일치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나는 오늘만 사는 놈이다. 내일을 걱정하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에게 죽는다."고 하는 대사에서 널리 퍼지게 되었다.
  • 우현(배우) . . . . 1회 일치
          * 구미호 가족 (2006) - 홍씨
  • 이정재(영화배우) . . . . 1회 일치
         총 관객 약 913만을 기록하며 역대 사극영화 중 네 번째 흥행작에 오른 관상은 평이 엇갈리고 지루하다는 평도 있으나,[* 2시간 20분이나 되는 긴 영화가 수양대군 등장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할정도로 극중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이정재가 연기한 [[수양대군]]에 대해선 거의 만장일치로 호평 일색. 많은 기자들은 관상이 이정재의 대표작 중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일반 관객들의 평도 매우 좋다. 관상보러 갔다가 [[수양대군|수양]] 보고 나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첫 등장 장면을 런웨이로 만들어 버리며 영화 시작 후 한 시간이 훌쩍 지나서야 나오는 첫 등장 장면을 포스로 잠식해 버렸다. 누리꾼들은 이정재의 등장씬을 [[늑대의 유혹]]에서 [[강동원(배우)|강동원]]의 우산씬, [[아저씨]]에서 [[원빈]]의 삭발씬과 함께 한국영화 3대 등장씬이라고 부른다. [[이병우]] 음악감독은 그 장면에 쓰인 음악이 영화에서 가장 많은 돈을 들였다고 했고, [[한재림]] 감독은 슬로모션 촬영 및 큰 개 두마리를 동원하여 시각적, 청각적으로 위협감을 주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 정성왕후 . . . . 1회 일치
         **** 며느리 : [[헌경왕후|헌경의황후]] 홍씨(獻敬懿皇后 洪氏, 혜경궁, 1735~1815)
  • 하동부대부인 . . . . 1회 일치
         **** 며느리 : 영의정 [[강녕군]] [[홍섬]](江寧君 洪暹, 1504~1585)의 딸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郡夫人 南陽 洪氏, 1544~1569)
  • 한성호 . . . . 1회 일치
         * [[오원빈]]
  • 홍병선 . . . . 1회 일치
         [[분류:1888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목회자]][[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도시샤 대학 동문]][[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서범 . . . . 1회 일치
         [[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천시 출신]][[분류:1980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비디오 자키]][[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세완 . . . . 1회 일치
         [[분류:197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유격수]][[분류:해태 타이거즈 선수]][[분류:KIA 타이거즈 선수]][[분류:서울구로남초등학교 동문]][[분류:경원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장충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남양 홍씨 (토홍)]]
  • 홍승규 . . . . 1회 일치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삼성 라이온즈 선수]][[분류:대구상업고등학교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대한민국의 야구 해설자]]
  • 홍윤기 (1933년) . . . . 1회 일치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1933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진기 . . . . 1회 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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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헌표 . . . . 1회 일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내무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체신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남양 홍씨 (당홍)]]
  • 희빈 장씨 . . . . 1회 일치
         * 《한중록》/혜경궁 홍씨 지음/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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